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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야기

변화 혹은 망각, 삶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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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샀다.


 


군대 가기 전 나의 대학생활은 매일매일 모자만 쓰고 다녔다.

남들 눈에 띄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할 만큼 숙맥이었던 나는

늘 눈이 안보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어폰만 끼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조용하고 사회성 없고 과 친구들하고도 잘 못 어울리고,

암튼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

날 기억하는 같은 과 여자 동기들이 있을까?

그렇게 생활하다 군입대를 하고 군대 제대후엔 이미 과 동기들은 다 졸업했으니까.


변화는

군대를 갔다 온 후 찾아왔다.

군대에서 모자를 질리도록 써서 군 제대 후 모자를 안 쓰게 되었고

군대생활 과정에서 책임감이란게 뭔지 알게 되었고

인간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일찍 알게 되면서

군 생활은 의외로 내게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군대 생활 하면서 성격도 외향적이고 추진력 있게 많이 바뀌었고

보통의 복학생 이미지와는 다르게 과 후배들과 너무 잘 어울렸다. 

신기하게도 나에게 과 후배들이 너무 잘 해 주었다.


추억 소환 겸 지금 생각해보니

영어영문학과였는데

철학이랑 인문학, 그리고 문화,예술에 엄청난 관심이 있었던 내가

과 후배들 사이에서 공부에 큰 도움이 된 듯하다.

참고로 영문학과는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영미문학을 배우는 곳이다.

후배들에게 부담되는 리포트 과제에 도움을 많이 줘서 그런지

리포트를 같이 많이 써주곤했는데 이게 결과가 좋아서 과 전체에 소문이 많이 났고

그러자 같은 학년으로 다닌 3학년 후배들부터 1~2학년 후배들까지  레포트 부탁이 많이 들어왔고

대학생활의 꿀, 과 술자리도 많았는데, 외면받는 복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늘 불려다녔고

암튼 다른 복학생 동기들의 시기, 질투를 받을 만큼 과 후배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그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별 거 아닌 복학생이었던 나를 잘 챙겨줬던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단 생각이다.


 

군대에서 연습한 한타속도가 850타는 기본이고 특히 영타가 700타 이상 나오다보니

영어 영문 학과 특성상 영문 리포트가 많았는데 1~2학년들이 누가 영타를 그렇게 치겠는가.

멘붕이었겠지.

학과 사무실에서 누구 한 명 제대로 영타를 칠 수 있는 이가 없었고

그러다 우연히 한 후배 영문 리포트를 과사에서 써주는 걸 후배들이 보면서

영문 리포트 써주는 일만으로도 친분이 급격히 좋아졌고,

3학년 2학기에 복학한 나는 그 당시라면 꽤나 고리타분한 복학생이었을 텐데

리포트 댓가?로 친분이 쌓이고 과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초대?받는 복학생이 되어 있었다.

뭐 MT도 과대며 후배들하고 같이 준비하고 불려갔으니 그저 고마웠을 뿐.

리포트만 써줬겠는가?

자연스레 친해지고 얘기도 하고 통하게 되고 그게 과생활인데 나에겐 늦게 찾아왔던것 같다.

1년 반 동안 졸업까지, 정말 즐거운 대학생활이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

3학년 2학기 가을 MT 때 

술자리 인기투표(그 당시엔 꽤나 인기 많은 무조건 하는 게임였다)에서 공동 1등을 했다. 자랑이다 ㅋㅋ 

과와 동아리, 학생회 사이에서는 군대 입대 전 대학교 생활과는 180도 변해있는 나였다.

군대가 힘들었지만 나에겐 도움이 되긴 했나보다.


한번은 대학의 꽃, 낯술 한 잔 걸치고 학생회 사무실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다른 과 후배가 영화 교양수업 과제로 오후까지 제출해야되는데 못썼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길래

술김에 10분 만에 대신 써 준 3장짜리 영화 리포트가

담당교수님 눈에 너무 인상적이었다며 A+ 받았다며 너무 고마워하며 즐거워하던 일도 생각난다.

나는 원래 연극영화과 지망생이었다.

 


동아리가 노래 동아리였는데 복학 후에 자작곡 만드는데 재미가 붙어

늘 곡을 만들었고 여러 곡을 매주 야외 공연에서 발표했는데

이게 과후배들에게 좋게 보였는지

과 후배들이 지나가는데 보았다며 노래 좋았다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스승의 날, 4학년인 내가 교수님과 학생들 앞에서 '스승의 은혜'를 키타치며 불렀던 기억이, 4학년이 ㅋㅋ


자작곡 공연 생활은 복학 후 대학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고

이게 학생회와 교내 방송국, 동아리 연합회 등에도 큰 인기가 있었고,

사회 프로 그룹과, 그 당시엔 누군진 몰랐지만 MBC PD에게도 관심이 갈 정도로

내 창작곡에 자부심이 생기기도 한 대학생활이었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녹음할 컴퓨터 환경이 아니어서 녹음해 놓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테이프 시대였고 CD 시대였고 윈도우 98시대였다.

지금 나에게 삶의 여유가 생긴다면 사진이 아닌 노래를 만들고 싶다.

아직도 대학생 때 YB(윤도현밴드)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2틀만에 만든,

YB(윤도현밴드)에게 주고 싶은 곡이 있다. 내 작은 꿈이기도 하다.

근데 이제 다 까먹어가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시에 곡을 붙였다.


물론 군대 가기 전엔, 과에서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여서 동아리활동만 하다가 F도 2개나 있어서

그거 메꾸느라 복학하고 공부를 열심히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는데(야간 수업까지 들어야 할 정도)

의외로 이게 학과장 교수님께 좋게 보여서 

4학년 졸업과정도 순탄대로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 문제 없이

행복을 아쉬워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맞다. 자랑 글이다. 내 홈페이지니깐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그 당시를 회고해봤다.

누구에게나 이 정도 살았으면 그리워할만한 인생의 황금기가 있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픈 젊은 날의 황금기.

반대로 말하면 지금은 참 힘들다는 얘기겠다.

다시 '모자' 얘기로 돌아와서


암튼 복학 후 난 모자를 쓸 일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오늘

모자를 하나 샀다.


지난 21년 동안 집에 모자 자체가 없었다.

21년동안 모자를 단 한 번도 쓴 일이 없었다.

근데 오늘 모자를 하나 샀다.

 


나는 지난 2년 가까이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다.

다시 대학교 초년 때처럼 대인공포, 군중 공포, 불안증세 등으로 너무나 힘든 시기를 걷고 있다.

여전히 아프다. 앞으로도 계속 아플 것이다.

이제 다시 사람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변화가 불행이 되고 있다.


모든 걸 하나둘씩 내려놓고 있다.

의미 없는 사회생활부터 

욕심과 한 길 인생,

하고 싶었던 것에 대한 즐거움까지.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이 길어지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사람에 대한 끈이 얼마나 단순하게 끊어지기 쉬운 지도 알게 되었고

코로나 19 시국과 겹쳐서 

더욱 증세가 빨리 진행되는 것 같다.

 

코로나 19 때문이 아니란 말이다.

증상과 생각의 변화는 코로나 19 전부터 시작되었고

코로나 19로 인해 그 속도가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몸이 느낀다.

그래서 21년 동안 안 쓰던,

정말 필요 없던 모자를 샀다.

 

모자 쓸 일이 많아질 것 같다.

어두워진 안색을 감추고 싶다.

내 불안을 숨기고

타인에 대한 거부감을 안보이기 하기 위해

주변을 굳이 안보기위해 

모자를 다시 꾹 눌러쓰게 된 것 같다.

 



삶은 시간 위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매달려가는 관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성격은 어릴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진 몰라도

몸은 시간의 흐름에 역행할 수 없다.

피부 트러블은 얼굴에 그대로 남아 스트레스가 되고

머리도 많이 빠지고 흰색 머리도 늘어난다.

몸은 안 아픈 날보다 아픈 날이 많다.

먹는 약은 늘어나고

타인의 꼴보기 싫은 일이 자주 보이고

이타심보다는 이기적인 주변 모습이 늘어나면서

타인에 대한 거부감이 다시 늘어만 간다.

심리상담을 받았다.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의 근본을 없애라는데

약이 듣지 않는 것 보니 좀 쉬는 것도 좋은 생각 같다고 했다.

최후의 처방인 것 같이 들렸다.

지난 2년동안 많은 의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더 이상 치료할게 없다'라는 말이었다.병원 다니면서 이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과 실망을 겪었고계속 듣다보니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맘까지 들었다.고통은 여전한데 말이다.이게 지난 2~3년 동안 나의 변화이다.그 종착점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난 오늘 모자를 샀다.

24년 전 가장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며...


그 때 나는 어렸다.

지금 나는 더 어려지고 싶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 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 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 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申庚林, 193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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